국립공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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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뚝 솟아 움직이지 않은 것이 산이나, 만났다 가고 쉽게 헤어지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모든 것이 빠르고 쉽게 변하는 세상과 달리 자연은 항상 어미니와 같은 품으로 변함없이 우리를 품어줍니다. 무등산 또한 호남 사람들의 든든한 안식처요 따뜻한 품으로서 만인을 품어주는 산입니다. 흔히들 무등산이 광주의 산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광주, 화순, 담양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화순 이서면에는 신선이 노니었다 할 만큼 아름다워 이름 붙여진 ‘도원마일’이 있습니다. 수려한 경관과 많은 이야기를 지닌 도원마을은 무등산 국립공원이 지정한 명품마을입니다.
용소계곡

도원마을에서 장불재로 어이지는 탐방로를 따라가다 보면 널따란 너럭바위가 인상적인 용소계곡에 닿을 수 있습니다. 무등산에서 발원한 용소계곡은 동복수원지를 지나 지암댐에서 섬진강으로 흘러갑니다. 용소는 ‘용(龍)이 사는 소(沼)’ 라는 뜻인데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400여 년 전 어느 해 초여름 광풍과 더불어 소나기가 내리더니 구름 속에서 백룡이 못으로 내려왔다. 비와 구름이 사라진 뒤 마을 사람들이 못에 가보니 용이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그날부터 용신제를 드리니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마을 사람들은 태평가를 불렀다, 모든 농민들은 이 못 가기를 금기하고 여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용왕님네”하고 물을 바라보며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그 뒤 어느날 동복현감(同福顯監)이 비연이라는 기생을 데리고 무등산 규봉암으로 소풍을 가다 이곳에 와서 놀았는데, 비연이 높은 바위 위에 올라 칼춤을 추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켜 칼을 쥔 채 못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노한 백룡이 소리를 지르며 요동을 쳤고,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자 동복현감은 어느 민가 안방으로 숨어버렸다. 뒷날 사람들이 못에 가보니 백룡은 오간데 없고 비연의 시체만 흙탕물에 떠있었다. 그 뒤부터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비가 오기를 바랬다. 그때부터 이 못을 용이 살다갔던곳이라 하여 용소(龍沼)라 하였다 한다.

도원마을은 산넘고 강 건너 한양으로 가던길로 장복동마을은 3개로 구분되었는s데 위에서부터 상장복마을(과거 도원마을), 중장복마을(현재 도원마을), 하장복마을(영신마을)로 불리었습니다. 과거 도원마을은 지금의 마을보다 위족에 있었습니다. 자동차나 기차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옛날 도원마을은 장불재를 넘어 광주나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 어귀에 위치한 활기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장불재

장불재는 광주광역시와 화순군의 경계가 되는 해발 900m의 고갯길입니다. (문헌비고)에는 장불치(獐佛峙),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불동(長佛洞)이라고 적혀있으나 이 고을 사람들은 이고개를 장불재라고 불렀습니다. 고객에서 동남족으로 뻗는 말잔등같은 능선은 산악인들이 “백마능선”이란 애칭을 붙여주기도 한 초원입니다. 가을철에 이 능선 위에 피어난 억새꽃이 바람결에 하늘거리면 마치 백마의 말갈기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장불재는 지금 규봉과 입석대, 서석대로 이어지는 등산로 구실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정상을 향하여 왼편으로는 서석대, 오른편으로는 입석대의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고 화순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지공너덜을 지나 규봉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입석대

해질 무렵 입석암에 도착했으니 양사기의 시에 이른바 “열여서 봉우리가 절을 감싸주었네”라는 구절은 이를 두고 말한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천지가 개벽할때 기가 무심히 엉켜 이렇게 기이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신공(神工)과 귀장(鬼匠)이 바람과 우레를 불러 이 고묘한 솜씨를 부린것인가? 아, 누가 이를 만들었으며, 누가 이를 다듬었던가? ... 고경명 [유서석록]

입석대는 서석대, 규봉과 더불어 무든산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400m 쯤 떨어져 있는 주상절리대입니다. 주상절리는 용얌이 식을 때 수축되어 생기는 절리 중에 단면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인 것을 말하는데 무등산의 주상절리는 약 7천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서 임석대, 규봉은 풍화가 많이 진화되어 기둥모양이지만 서석대는 풍화가 덜 진행되어 병풍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 입석대는 바람을 막아주는 야영터로 요긴하게 쓰이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천연기념물 제 46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지공너덜

장불재에서 규봉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지공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너덜’, ‘너덜겅’은 풍화된 암석이 부서져 산비탈을 덮은 것으로 한마디로 돌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윗덩이가 제멋대로 굴러 떨어져 있지만 사이사이에 자라난 관목과 어울려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곳을 지공너들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400년전 기록된 지공너덜
고경명과 임훈 목사 일행은 염불암에 도착하였다. 암자 동쪽에 돌무더기가 잔뜩 모여 있는 것이 있는데 듣자하니 지공너들이라고 하였다. 임훈 목사가 “지공은 원나라때 고승이 아닌가? 어찌하여 이곳에 이름이 있는게지?”라고 물었다. 고경명은 이곳은 산 정상에 있는 기둥바위들이 수천 년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무너져서 쌓이고 쌓인 것이랍니다. 어떤 돌은 서있는가 하면 어떤 돌은 누워 있다 보니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나무꾼이 이곳을 지나다가 도끼를 그만 떨어뜨렸는데 도끼가 돌에 부딪치며 떨어지는 소리가 한 식경이 지나서야 멈췄다고 하더군요, 또 어떤 사람은 소나기가 내리고 나면 숨어 지내던 이무기가 나와서 햇볕을 쐬는데 그 모습이 하도 무서워서 사람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을 지공이라 한 까닭은 저도 잘 모릅니다만 이런 이야기가 있더군요, 중국의 어느 고승이 돌무더기를 모아놓고 설법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법문을 마칠때마다 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도력 높은 스님의 법문은 돌조차 움직일 정도였나봅니다. 설마 원나라 고승이 이곳까지 왔을리는 만무하겠지요”하고 대답한다. 임훈 목사는 “듣고보니 자네 말이 더 설득력이 있네 그려”하고 마주보며 웃는디.. 고경명[유서석록]

또 지공너덜에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놀’의 이름을 딴 ‘보조석굴’이 있습니다. 바위가 저절로 지붕을 이루어 굴이 되었는데 기둥을 세우고 문을 달아 암자를 만들었습니다. 이석굴에서 보조국사가 수도하고 뒷날 송광사에 가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규봉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약 2km쯤 산길을 가다보면 있는 층암괴석을 규봉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절의 입구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을 규봉이라 했는데 지금은 이 바위를 삼존석이라고합니다. 규봉암에 들어서면 삼존석의 왼쪽 바로 밑에 넓은 반석이 있는데 이것이 입석-서석과 함께 무등산 3대석의 하나인 광석대입니다. (혹은 규봉 전체를 광석대라고 부릅니다). 또 규봉의 뒤쪽에는 열개의 신비스러운 돌기둥 십대가 있습니다.

“이곳은 필히 하늘이 점지해준 곳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뭄에 상관없이 일정할 수있겠는가. 이게 바로 영험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선 후기 학자 양진영이 규봉을 보고 한 말입니다. 양진영은 규봉이 큰 가뭄이 일어도 그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 염험한 곳이라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규봉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삼은 작은 사찰 “규봉암”이 있습니다. 절의 창건을 정확히 밝혀줄 문헌은 보이지 않으나 한 폭의 그림같은 주상절리를 배경으로 자리한 규봉암은 통일신라시대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절에 전하는 설화에는 의상스님이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음을 기이하게 여겨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절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고려 후기의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은 절 주변의 삼존석과 십이대에서 수도하여 득도했다고 합니다. 늦은 오후면 들려오는 규봉암의 은은한 종소리를 무등산에서 느낄 수 있는 또하나의 작은 즐거움입니다. 규봉암과 관련하여 재밌는 사실은 옛 규봉암 스님들은 광석대에서 수행할 때 광석대 아래 나무를 넣고 불을 피워 돌을 따뜻하게 데웠다고 합니다.

6.25전쟁 그리고 도원마을

광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상장복 마을 (옛 도원마을)은 많은 주막과 쉼터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오늘날과 달리 인구가 그리많지 않던 시절임에도 100여 가구가 살 정도로 번창한 큰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광복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상장복 마을 또한 전쟁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인민군이 화순-광주의 주요 길목인 상장복 마을을 점령하자 한국 연합군은 상장복마을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마을이 불타 살수 업섹 되자 상장복 마을 사람들이 중장복으로 모여 살게 되었고 마을 이름을 ‘도원’마을이라 하였슷ㅂ니다. 도원마을에서 장불재가는 탐방로를 따라가다 보면 돌담이나 탐방로 곳곳에 있는 작은 도자기 파편 등을 통해 이곳이 마을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삶의 터전이 없어진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아래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나큰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살기 좋다는 의미에서 무릉도원, ‘도원마을’이라고 지었습니다. 도원마을에서 장불재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걸으면서 곳곳에 보이는 돌담이나 도자기 조각을 직접 확인해보세요.

농업유산 : 다랭이논과 봇도랑

‘다랭이논’은 경사진 산비탈을 개간하여 층층이만든 계단식 논을 말합니다. 계단식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계단식논 또는 다락논, 다락이논이라고도 합니다. 도원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어귀에서부터 다랭이논을 볼 수 있습니다. 다랭이논은 농사를 짓기 어려운 산간지역이나 해안지역을 괭이와 삽 등으로 땅을 갈고 다듬어 만든 것으로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도원마을에서는 다랭이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었던 ‘봇도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봇도랑은 보의 물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며 논에 물을 대기 위한 것으로서 옛 도원마을 주민들은 과거 마을 뒷산에 보를 설치한 뒤 수 킬로미터를 손수 땅을 파 봇도랑을 만들어 논에 물을 댔습니다. 다랭이논은 홍수를 방지하고 토양 유실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랭이논은 생태계를 보호하며 특히 곤충류, 양서류, 어류 등의 서식지로서 인공습지의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랭이논은 경작조건이 불리한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경작하지않거나 유실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봇도랑도 다랭이논과 함께 허물어지거나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또 봇도랑이 자주 허물어져 1980년애부터 봇도랑에 파이프를 묻어 흙은 덮어버린곳도 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논이 계단식논(다랭이논)인 필리핀에서는 1995년 계단식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도원마일의 다랭이논과 봇도랑 또한 많은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우리의 소중한 농업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