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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공단 역사아카이브

일제에 의한 지리산의 수난 모습

일제에 의한 지리산의 수난 모습
일제에 의한 지리산의 수난 모습

피아골 입구의 숯 창고와 운반선 모습(서울대 남부학술림), 지리산 옥녀봉 법계사 인근에서 제거한 쇠말뚝의 모습,

일제강점기 노고단 선교사 휴양촌의 모습1940년 추정, 부산MBC소장 김재문), 일제강점기 시절 반야봉 정상의 구상나무군락 모습(서울대남부학술림)이다.

 

1920년대부터 일본 동경제국대학이 노고단 일대를 교육용 연습림으로 점유하고 있었고,

1925년에는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기독교 선교사들이 임대받아 휴양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 공사에 쓰인 석재와 재들은 모두 지리산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지리산 깊은 곳으로 수탈자들의 손길이 닿자 산림훼손과 더불어 야생동물 남획도 더욱 빈번해졌다.

해로운 짐승을 없앤다는 '해수구제'라는 정책 하에 무차별적으로 포획하고 사살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정기를 꺾는다'며 옥녀봉에 대포알 같은 쇠말뚝을 박았다.

 

192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국립공원을 추진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구상이 있었지만, 실제 시도에 나선것들은 바로 지역민들이었다.

구례군민들은 1936년 지리산 개발과 등산로 확장 등을 요구하며 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하였고,

휴양촌이 건설된 후 탐방온 외지인들이 지리산의 자연경관에 크게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초선총독부는 타무라박사 등을 시켜 지리산 일대를 조사하였고 등산로 확장과 숙박시설 및 휴게소 설치를 협의하였으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개전된 후 전쟁에 몰두하여 국립공원 지정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되었다.

 

 

  • 서울대남부학술림,김재문 부산MBC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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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과거 일제 수난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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